굉장히 오랜만에 블로그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알고리즘 문제 풀이 관련 글만 올리다가 처음으로 일상과
관련된 글을 써보는데, 어색하지만 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올해 가졌던 고민들과 그에 대한 제 생각을 통해 누군가(어쩌면 수험생들...?)가 도움을 얻을지도 몰라,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게 2024년 한 해는 뭐라고 정의하기 굉장히 어려운 한 해인 것 같습니다. "후회없이 잘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라고 한다면 망설여지기도 할 것이며 개인적으로 만족한 것도, 아쉬운 것도 많이 남는 한 해인 것 같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해보자면 저는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2024년 KAIST에 진학하여 새내기과정학부를 마친 학생입니다.
작년 이맘 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큰 우울감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던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수시 2차 면접에서 탈락하게 되면서 2달 동안 죽어라 준비했던 면접 공부가 허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비록 저희 고등학교에서 합격 사례가 없었긴 하지만 제 내신과 생기부를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되었고 소신지원하였으나, 노력한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 일주일 정도를 우울감에 잠겨 지냈습니다.
결과적으로 망한 입시는 아니었지만(카이스트를 붙어 진학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2023년을 보내고 2024년을 맞으며, 새해 다짐과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던 여느 연초와는 다르게 굉장히 무기력하게 한 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개강이 다가왔습니다.
KAIST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주는 국내 최고의 이공계 대학 중 한 곳이고, 많은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재학 중이었으나 제게 1지망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대를 떨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KAIST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안정권이었던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와 소신 지원인 서울대 컴공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했던 2023년 9월을 생각하며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습니다. 우울감이 채 해소되지 않은 채 진학한 새내기 생활은 그다지 밝을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홀로 공부만 하며 지내다보니 우울감이 우울감을 증폭시키듯이 커져갔습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마치 면접 공부에 쏟아부었던 2달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우울함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동아리, 인간관계는 챙기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 한 학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얻은 것을 생각해보라고 하면 아마 성적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여름 학기를 맞이하면서 제 우울감이 극복될 변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UC Berkeley에서 약 2달 간 계절학기를 수강하게 된 것입니다. UC Berkeley의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수강신청을 하는 과정, 기숙사 입소를 위한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들이 굉장히 설레고 기대되었습니다. 아마 2024년 들어 처음으로 가슴 뛰었던 일 같습니다. UC Berkeley에서 보냈던 시간은 굉장히 환상적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영화를 보러 가거나, 쉬는 날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하기도 하고, 시험 전날에 쪽잠자며 벼락치기로 공부해 중간고사를 치른 경험도 마냥 즐겁고 좋았습니다. 꿈만 같았던 행복한 2달의 시간이 지나고 한국에 귀국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했습니다.
마음에 안정을 찾게 되고 남은 방학 기간 동안 전 카이스트에서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고, 무엇을 목표로 둘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제가 추구하는 직업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UC Berkeley에서 들었던 게임이론이 너무 재밌었고, 인공지능과 컴퓨터 과학을 좋아하지만, 물화생지 전 과목을 모두 좋아하고 두루두루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진로에 대해 다양한 길을 열어놓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다양한 분야(생명과학과 수학과 같은 매우 다른 분야 등을 포함)를 융합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제 고교 생기부를 열람해보니 많은 교과목 선생님들께서 절 '융합적인 인재'로 표현해주셨었습니다.) 또한 제 성격은 도전적인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이상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 성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마음 한 켠에 남은 지난 입시에서의 아쉬움이 더해져 수시 재수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의대 증원 등의 입시 이슈로, 워낙 깜깜이 입시가 되어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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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저는 중앙대학교 약학부 1차에 합격하게 되었고, 면접을 통과해 최초합하게 되었습니다.
'탐구인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4년 전액장학금까지 지원된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기뻤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인생에 주어진 두 갈래의 길 중 한 곳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되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친구들, 친척 분들, 익명으로 의견을 주신 분들)의 의견을 종합하며 고민했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주신 말은 "결국은 네가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길에도 틀린 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컴퓨터를 계속하고 싶다면 KAIST에 남아도 되지만, 약대를 졸업하고 면허를 가진 채로 컴공 대학원에 진학하면 된다는 의견이 정말 많았습니다. 또한 안정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약대도 충분히 매리트가 있으며, 다른 학교도 아니고 중앙대 약학부이니 진학해서 손해볼 것은 없다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반면, 이공계열이 충분한 재능이 있다면 KAIST에 남아 연구자로 성장하는 것도 매력있다는 의견도 듣게 되었습니다.
전 남학생이다 보니 군 문제와도 중첩되어 고민이 들었습니다. 많은 의견이 중첩되며 제 판단을 하나로 세우기 정말 어려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약사로서의 제 인생을 생각해보았을 때 전문적인 약제 지식을 가지고 임상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6년의 긴 시간 동안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컴퓨터 과학자로 성장하고자 했던 지금까지의 제 생각에 많이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영부영 보냈던 새내기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 더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공계열에 한정되지 않은)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저는 중앙대 약대 등록을 포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중앙대 약대도, 카이스트 전산학부도 아닌,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에 진학하였습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컴퓨터 과학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제약학도 아닌 지금 당장 구체적인 목표도, 연구 목표도, 앞으로의 비전도 생각하지 않았던 길인 전기전자공학부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제 고민 끝의 결론은, 필드가 넓은 전자과에 진학하여 컴퓨터, 디바이스, 통신, 소재 등의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배워보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부전공으로 생명과학, 뇌과학 등을 공부하며 생명과학에 대한 학습 열정을 발휘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앙대 약대만의 고유한 장점은 절대 카이스트에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카이스트만의 고유한 장점도 중앙대 약대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공대와 약대, 두 길은 굉장히 다른, 그렇지만 유불리를 가릴 수 없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분들이 약대 진학을 권장하고, 약대 졸업 후 컴공 석박 학위 취득 등 다양한 의견을 제안하셨지만, 저는 결정을 하면서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제 자신이 스스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도 분명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약대를 진학했다가 화학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6년을 힘들게 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나 약대 증원에 따른 수입 감소에 대한 걱정, 카이스트에 남았다가 전문직을 선택하지 못해 느낄 아쉬움 등은 명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안정적인 전문직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당시의 제 마음은 제 역량을 도전적인 시도에 활용해보고 싶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물론 언젠가 크게 후회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중앙대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살짝 후회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후회는 1년 전 제가 했던 돌이킬 수 없던 선택에 대한 한탄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그 당시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면, 현재 하고 있는 후회는 그저 아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그 때 결정하는 순간의 제 생각에 따를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저는 전기전자공학부에 진학하여 성취도 해보고 때로는 좌절도 하며 도전적인 제 자신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었기에, 2025년에는 그 생각을 실행시켜보고 싶습니다.
2025년에도 수많은 결정과 후회를 반복할 겁니다. 이 수많은 결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만의 고유한 가치관과,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후회하더라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담대함과,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용기가 함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